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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길] 대중 소외와 고독한 현대인 - 데이비드 리스먼, 고독한 군중

논길 - 논술의 길

by happynaraepapa 2025. 3. 26.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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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m.wikipedia.org/wiki/%EA%B3%A0%EB%8F%85%ED%95%9C_%EA%B5%B0%EC%A4%91

A.
고독한 군중(The Lonely Crowd)은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먼이 1950년에 쓴 저서로, 용어로도 사용된다. 부제는 '변화하는 미국의 성격에 대한 연구'이다.

리스먼은 이 책에서 미국인의 성격과 미국의 사회의식이 어떻게 형성되고 나타나는지 분석하고자 하였다. 또한 인류의 역사적 사회성격을 인구변동과 관련해 전통지향형(tradition directed type), 내부지향형(inner directed type), 외부지향형(other directed type)의 세 가지로 분류하여 사회가 전통지향형, 내부지향형, 외부지향형 차례대로 발전한다고 하였다. 전통지향형은 전통사회에서 전통과 과거를 행위모형의 주요 기준으로 삼은 인간형이며, 전통사회 이후 19세기 초기공업시대까지의 가족에 의해 학습된 도덕과 가치관이 행위기준이 된 인간형이 내부지향형이다. 마지막으로 외부지향형은 또래집단이나 친구집단의 영향에 따라 행동하는 현대인으로 이들은 타자들에게 격리되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내면적인 고립감에 번민하는 사회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지향형의 시대는 자기 상실의 시대로 정치적 무관심을 조장하고 결과적으로는 민주주의 체계를 위협한다고 설명하였는데, 이러한 외부지향형 성격유형을 ‘고독한 군중’으로 파악하였다.

체계적이고 비판적인 이 책은 새롭게 등장한 미국 현대사회의 모습을 명쾌하게 분석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B.
“사관학교 시험에서 미역국을 먹고 나서도 얼마 동안, 나는 나처럼 대학 입학시험에 실패한 친구 하나와 미아리에 하숙하고 있었습니다. 서울은 그때가 처음이었죠, 장교가 된다는 꿈이 깨어져서 나는 퍽 실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때 영영 실의 해 버린 느낌입니다. 아시겠지만 꿈이 크면 클수록 실패가 주는 절망감도 대단한 힘을 발휘하더군요. 그 무렵 재미를 붙인 게 아침의 만원 된 버스칸이었습니다. 함께 있는 친구와 나는 하숙집의 아침 밥상을 밀어 놓기가 바쁘게 미아리 고개 위에 있는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갑니다. 개처럼 숨을 헐떡거리면서 말입니다. 시골에서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온 청년들의 눈에 가장 부럽고 신기하게 비치는 게 무언지 아십니까? 부러운 건 뭐니 뭐니 해도, 밤이 되면 빌딩들의 창에 켜지는 불빛, 아니 그 불빛 속에서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이고, 신기한 건 버스 간 속에서 일 센티미터도 안 되는 간격을 두고 자기 곁에 예쁜 아가씨가 서 있다는 사실입니다. 때로는 아가씨들과 팔목의 살을 대고 있기도 하고 허벅다리를 비비고서 있을 수도 있어서 그것 때문에 나는 하루 종일 시내버스를 이것저것 갈아타면서 보낸 적도 있습니다. 물론 그날 밤에는 너무 피로해서 토했습니다만…….”

“잠깐, 무슨 얘기를 하시자는 겁니까?”

“꿈틀거리는 것을 사랑한다는 얘기를 하려던 참이었습니다. 들어보세요. 그 친구와 나는 출근 시간의 만원 버스 속을 쓰리꾼들처럼 안으로 비집고 들어갑니다. 그리고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젊은 여자 앞에 섭니다. 나는 한 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나서, 달려오느라고 좀 멍해진 머리를 올리고 있는 손에 기댑니다. 그리고 내 앞에 앉아 있는 여자의 아랫배 쪽으로 천천히 시선을 보냅니다. 그러면 처음엔 얼른 눈에 뜨이지 않지만 시간이 조금 가고 내 시선이 투명해지면서부터 나는 그 여자의 아랫배가 조용히 오르내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르내린다는 건……호흡 때문에 그러는 것이겠죠?”

“물론입니다. 시체의 아랫배는 꿈쩍도 하지 않으니까요. 하여튼…… 나는 그 아침의 만원 버스 간 속에서 보는 젊은 여자 아랫배의 조용한 움직임을 보고 있으면 왜 그렇게 마음이 편안해지고 맑아지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 움직임을 지독하게 사랑합니다.”

C.
source:
https://sgsg.hankyung.com/article/2020121828011

[다시 읽는 명저] '고독'과 '군중' 모순어법으로 현대사회의 획일화 비판 | 생글생글

[다시 읽는 명저] '고독'과 '군중' 모순어법으로 현대사회의 획일화 비판, 양준영

sgsg.hankyung.com


데이비드 리스먼 (1909~2002) 미국의 사회학자로 산 업화 된 대중사회의 메 커니즘을 날카롭게 분석했다.

“매스미디어의 영향으로 타인지향적 아이는 내부지향적 시대의 어른보다 더 세련된 방식으로 인간관계의 속사정을 예민하게 파악한다.”“자신의 생각이나 생활 자체가 얼마나 흥미로운지 알아차리면 더 이상 군중 속의 고독을 동료 집단에 의지해 애써 누그러뜨리지 않아도 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명실상부한 유일 초강대국 반열에 올랐다. 전쟁은 미국의 경제적 번영에 크게 기여했다. 1950년대 미국은 풍요로운 사회로 불렸다. 1930년대 시작된 뉴딜 정책과 2차 대전을 거치면서 미국 사회에서는 소득 분배의 평준화가 일어났고, 중산층은 사회 중심세력으로 급속히 자리 잡았다. 소득 격차가 줄어들면서 소비 유형은 비슷해졌다. 미국 사회는 획일화·동질화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자신만의 개성을 추구하기보다는 집단적인 기준을 따르는 ‘순응주의’가 일반적 현상으로 나타났다.

미국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먼(1909~2002)의 《고독한 군중(The Lonely Crowd)》은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나왔다. 그는 이 책에서 산업화된 대중사회의 구조적 메커니즘과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미국인의 사회의식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날카롭게 분석했다. 처음엔 1940년대 후반 미국인들의 정치적 무관심의 근원에 대한 연구로 출발했다. 그러나 많은 초안을 거치면서 미국인의 삶에 대한 야심 찬 연구로 발전했다. 학술서임에도 1950년 초판이 나왔을 때 7만 부가 매진됐고, 1954년 보급판은 50만 부가 팔렸다. 미국 학계에선 찬사와 비판이 함께 쏟아졌다. 일반 독자층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시대를 대표하는 저서가 됐다.

‘고독’과 ‘군중’이라는 모순어법은 기업화, 관료화, 단일화돼 가는 미국 사회의 문제점을 포착했고, 현대 산업사회에서 개인의 소외를 나타내는 대표적 문구로 자리 잡았다.

리스먼은 사회의 변화와 그 사회 구성원들의 생활양식 변화를 ‘사회적 성격’이라는 개념을 통해 파헤쳤다. 사회적 성격은 ‘주요 사회집단 사이의 공통된 성격’으로 사회집단들의 경험에서 나온 산물이다. 온갖 계급, 집단, 지역, 국가의 성격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는 역사적으로 ‘전통지향형’ ‘내부지향형’ ‘타인지향형’의 세 가지 사회적 성격이 등장했다고 주장했다. 전통지향형은 사회 구성원이 전통과 과거를 추종하는 데서 주요 행위기준을 찾는 봉건적 시대의 사회적 성격이다. 내부지향형은 가족 안에서 학습된 도덕과 가치관이 행위기준이 된 유형으로, 19세기 공업시대 주류를 형성했다. 타인지향형은 또래집단 등이 갖는 가치체계로부터 영향을 받아 행동하는 인간형으로, 당시 미국 대도시 상류층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을 가리킨다.

리스먼은 당시 미국 사회가 물질적 풍요와 관용적인 분위기에서 타인지향형 인간이 점점 다수를 이뤄가고 있다고 봤다. 이는 생산의 시대에서 소비의 시대로, 인쇄문화에서 영상문화로 변화한 것과도 상응한다. 부모의 권위는 쇠퇴하고, 또래집단과 매스미디어의 영향력은 확대됐다. 리스먼은 “매스미디어의 영향으로 타인지향적 아이는 내부지향적 시대의 어른보다 더 세련된 방식으로 인간관계의 속사정을 예민하게 파악한다”라고 했다.

현대사회는 매우 개인주의적이고 자유로운 경쟁사회라는 게 당시의 인식이었다. 하지만 대중사회가 본격화되면서 개성보다 대인관계가 더 중요해졌다는 게 리스먼의 진단이다. 타인지향형 사회를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는 심리적 욕구가 커진다. 타인의 관심사를 포착하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공동체나 조직으로부터 격리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만 소외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번민한다. 리스먼은 자아상실의 수렁에 빠진 이들로 구성된 타인지향형 사회는 정치적 무관심을 조장하고, 민주체제에 위기를 가져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리스먼은 세 가지 사회적 성격의 전형적인 모습은 ‘적응형’에 속한다고 봤다. 적응형 인간은 거의 완전하게 그들의 사회 및 사회계급을 반영한다. 이에 비해 ‘자율형’은 사회에 순응할 능력이 있으면서도 순응 여부에 대한 선택의 자유를 갖는다.
또래집단서 벗어나 개인능력 키워야
리스먼은 타인지향적인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율형 인간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래집단에서 자유로워짐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키우고 자율성에 이르는 길을 개척해 나갈 수 있다고 했다. 인간은 제각기 다른 존재로서 창조됐는데, 서로 똑같아지기 위해서 사회적 자유와 개인적 자율성을 상실했다는 지적이다. 리스먼은 “개개의 인간은 저마다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며 “자신의 생각이나 생활 자체가 얼마나 흥미로운지 알아차리게 된다면 더 이상 군중 속의 고독을 동료 집단에 의지해 애써 누그러뜨리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런 상태가 됐을 때 인간은 자신의 실제 감정과 포부 등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갖게 될 것이라고 했다.

《고독한 군중》은 1950년대 미국 사회를 이해하는 창을 제공했다. 책에 등장하는 많은 사회적 특성은 지금은 상당 부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터넷과 소셜미디어 발달로 타인이 개인의 일상에 미치는 영향이 커진 지금 리스먼의 책은 출간 당시보다 더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사회적 성격, 조직화된 시대 인간 자율성의 의미 등 이 책이 제기하는 질문은 시대를 넘어 여전히 유의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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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https://book.skku.edu/%EC%96%B4%EB%A6%B0-%EC%99%95%EC%9E%90-le-petit-prince-4/

어린 왕자 (Le Petit Prince) | 성균관대학교 오거서

‘어린왕자’를 아주 어렸을 때 처음 읽었다. 그 때는 책을 읽고도 별 감흥이 없었다. 여우, 뱀과 대화를 하는 어린왕자,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내용의 전부였다. 어른이 되고나서 다시 읽고 싶

book.skku.edu


‘어린 왕자’를 아주 어렸을 때 처음 읽었다. 그때는 책을 읽고도 별 감흥이 없었다. 여우, 뱀과 대화를 하는 어린 왕자,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내용의 전부였다. 어른이 되고 나서 다시 읽고 싶어졌다. 유년의 내가 놓쳤을 많은 것들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이 돼서야 비로소 눈에 보이는 것들을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다시 읽어본 어린 왕자는 가슴이 먹먹할 정도로 좋았다. 전에 읽었을 때 느끼지 못했던 많은 생각과 감정이 끓었다. 사막에 비행기가 고장이 나서 홀로 남겨진 조종사, 그리고 그의 곁에 홀로 다가온 어린 왕자. 어린 왕자는 조종사에게 양을 그려달라고 한다. 조종사는 몇 장의 양 그림을 건네지만, 어린 왕자는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비행기를 하루빨리 고쳐야 하는 조종사는 이 상자 안에 양이 있다고 말하면서 상자 하나를 그려서 준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어린 왕자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어른들은 확실한 것을 원한다. 눈에 보여야만 하고, 이해되어야만 하고, 남들이 선택해 온 가치를 본인 삶이 추구해야 하는 것으로 삼는다. 그래서 본질적인 것을 보지 못한다. 본인 스스로가 무언가를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창조해내지 못하고, 상상을 헛된 공상에 불과하다며 가벼이 여긴다. 어른들은 자신들도 한 때 어린이였다는 것을 망각하고 산다. 그래서 삶이 주는 조그마한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목적 없이 살아간다.

어린 왕자는 계속해서 말한다. ‘어른들은 참으로 이상하군.’ 어린 왕자가 만난 어른들은 누군가를 지배하고, 심판하고, 명령하려 한다. 칭찬 외에는 듣지 않으려 하고, 자신이 하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점등인을 제외하고는 어린 왕자가 만난 모든 어른들은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산다. 그래서 맞지 않는 옷을 입고, 가면을 쓰며, 거짓된 감정으로 얼룩진 삶을 산다. 어린 왕자가 유일하게 친구로 삼고 싶은 어른은 점등인이다. 다른 존재를 위해서 세상을 환하게 만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가끔 진심을 다해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비웃고는 한다.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서 누굴 돕느냐면서. 그런데 어린 왕자는 사람이 가장 빛나는 순간은 이익이 아닌 진정성이 부각될 때라는 진실을 가르쳐준다. 진정성은 타인을 위해 바친 내 시간과 동의어이다. 대학에 와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관계를 맺다 보면, 나와 타인의 언행에서 드러나는 위선과 공허함에 환멸을 느낀다.

어린 왕자와 뱀의 대화가 가슴에 가장 와닿았다. 어린 왕자는 뱀에게 사막에서는 약간 외롭다며 사람들은 어디 있는지 묻는다. 뱀은 대답한다. “사람들 틈에 끼어있어도 마찬가지로 외롭지.” 내 주변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있는 듯 없다. 요즘 정말 외로움을 많이 느낀다. 내 인간관계의 대부분이 피상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린 왕자가 부러웠다. 자신이 사는 행성에는 장미꽃 한 송이 밖에 없지만, 그는 그것의 소중함을 알고, 걱정할 줄 안다. 지구에서 별들을 보며 아름다움을 느낄 줄 안다. 모든 별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꽃 한 송이처럼 꽃이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어떠한 존재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음을 역설한다.

인간관계와 나라는 존재에 많은 회의를 느낀 요즘, 이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여우가 말한 ‘길들이다’는 노력을 다하고, 시간을 기울이고, 그리움을 느끼고, 걱정을 하는 것이다. 나를 길들이고, 내가 길들였다고 생각하는 얼마 되지 않는 주변의 소중한 존재들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그들 덕분에 내가 세상을 특별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는 정말 주옥같은 문장이 많은 책이었다. 예전에 누가 어린 왕자가 실제로는 심오한 철학책이라고 말했는데, 지금에서야 그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어른이 된 내가 이 책을 사랑하는 이유는 아마 시간이 흐르면서 내 안의 많은 것이 변하고, 순수함을 잊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너무 닳고 닳은 사람이 된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말해준 비밀을 쓰며 서평을 마치겠다. “내 비밀은 이거야. 아주 간단해. 오직 마음으로 보아야 잘 보인다는 거야. 본질적인 것은 눈에 안 보인단다.”


E.
source:
https://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20072

불교에서 바라본 프롬의 소외 이론

1. 서론: 소외의 일반적 개념

현대산업사회에서 사람의 상실감, 절망감, 불안감 등의 심리상태 또는 그러한 것이 나타나는 사회현상을 포괄하는 적절한 용어가 소외(alienation)라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소외라는 말은 상당 부분 일상용어처럼 사용되고 있다. 동료나 친구 또는 다른 사람의 관계에서 서로 간에 서먹한 느낌이 들 때, 그리고 이들에게서 따돌림을 당할 때도 소외라는 말을 쓴다. 또 자신이 종사하는 일이나 직무에 대해 불만을 가졌을 때, 그리고 그러한 일들이 본질적인 보상과 보람을 가져다주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도 소외라는 말을 사용한다. 급변하는 사회적 상황에 대해 잘 파악이 되지 않을 때, 그리고 급변하는 현상에 대해 무력감을 느낄 때도 소외라는 말을 쓴다.

이처럼 소외라는 말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여러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소외의 개념은 인간의 주관적 · 심리적인 감정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기도 하고, 객관적 · 구조적인 조건을 말할 때 사용되기도 하며, 또 이런 것을 비판하고 강력한 개선을 요구할 때도 사용되기도 한다.

소외가 이처럼 다양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여러 학문 분야에서 소외에 대해 검토하고 있다. 처음에는 철학, 문학 등의 인문학에서 주로 관심을 가졌다. 오늘날에는 사회학을 비롯해서 심리학, 정치학, 경제학 등 여러 사회과학에서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사회학 분야에서 소외에 대해 연구한 학자들이 있지만, 여기서는 멜빈 시먼(Melvin Seeman)의 개념을 소개하고자 한다. 시먼은 현대사회에서 개인이 가지는 기대감과 그에 따른 보상의 괴리에서 오는 심리현상으로 소외를 설명한다. 사람은 자신의 행위가 크게 영향력이 없다고 느낄 때, 곧 무력감과 무의미성에 시달릴 때 소외를 느낀다. 행위가 자신에게 보상을 해주지 않을 때 예를 들면 돈만을 위해 일하는 노동자는 자기 소외를 느끼게 된다. 시먼은 소외를 6가지로 구분해서 말한다.

첫째, 무력감이다. 이는 자신의 행동으로 개인적 · 사회적 보상을 조절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소외된 사람에게는 이러한 조절이 외부의 힘, 강력한 타자, 운명 등에 맡겨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둘째, 무의미성이다. 이는 장차 일어나게 될 행위의 결과에 대해 만족할 만한 예측을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삶에 대한 전반적인 목적이 상실된 느낌이다.

셋째, 무규범성이다. 이는 일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수단의 동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공유된 사회규범을 지키지 않아서 광범위하게 비행이 확산되고 개인이 경쟁이 무제한적으로 벌어지는 것이다.

넷째, 문화적 소외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높이 평가하는 목표와 신념에 대해 낮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예술가나 지식인이 사회에 유행하고 있는 대중문화를 잘 수용하지 못하거나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가치에 대해 거부감을 가질 때 생기는 것이다.

다섯째, 자기 소외이다. 이는 정의하기 어려운 것인데 여러 가지 점에서 자기 스스로에 대해 괴리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여섯째, 사회적 고립이다. 이는 사회적 관계에서 느끼는 고독감이나 배척의 느낌이다. 다시 말하자면, 소수집단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고립감이다.

다양한 소외 이론이 있지만, 이 글에서는 에리히 프롬의 소외 이론에 초점을 맞추어서 서술하고, 그리고 프롬의 소외 이론을 불교의 관점에서 어떻게 볼 것인지 검토하고자 한다.

2. 프롬의 소외 이론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 유대교 랍비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프롬은 어려서부터 유대교에 반대하는 기독교 사회에서 생활하였기 때문에 감정적 고립 상태를 경험하였다. 이러한 상태의 프롬에게 구약성서는 큰 감동과 용기를 주었다고 한다. 그는 1923~24년경에 베를린 정신분석연구소에 들어가서 정신분석학을 공부하였다. 1929년에 프랑크푸르트학파와 접촉하였고, 프롬은 마르크스 사상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접목하려고 하였다. 1939년 그는 프랑크푸르트학파와 결별하고 자신의 독자적 세계관을 세우고자 하였다.

여기서는 그의 여러 저술 가운데 《자유로부터의 도피》(1941), 《건전한 사회》(1955)의 일부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프롬은 ‘도피의 메커니즘’으로 3가지를 제시하는데, 이는 사회적으로 고립된 개인이 외부세계와 분리되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불안감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이다. 다시 말하자면, 현대사회에서 개인은 무력감과 고독에 빠지게 되었고, 이것에 벗어나기 위해 근원적인 해결책을 추구하기보다는 ‘도피의 메커니즘’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권위주의 메커니즘, 파괴성의 메커니즘, 자동인형적(自動人形的) 동조(同調)이다. 그리고 프롬은 《건전한 사회》에서 이 3가지 ‘도피의 메커니즘’을 활용해서 현대사회의 소외현상을 설명한다.

1) 권위주의 메커니즘

‘권위주의 메커니즘’은 일차적 연대 관계를 상실한 개인이 새로운 이차적 연대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과정에서 개인은 자아의 독립을 포기하고 자신의 외부에 있는 인간이나 대상에게 자신을 융합하는 경향을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개인은 일차적 연대 관계를 상실하게 됨에 따라 고독과 무력감에 주는 공포에 빠지게 되고, 이러한 고독과 무력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인간이나 대상을 지배하거나 복종하게 된다는 것이다.

프롬은 이와 같은 ‘권위주의 메커니즘’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디즘적 충동’ 또는 ‘마조히즘적 충동’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원래 프로이트가 성적(性的)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나온 이론인데, 프롬은 이것을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쪽으로 확대하고 있다.

프롬에 따르면, ‘사디즘적 경향’은 다른 사람을 자신에게 종속시켜서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것만이 아니라 거기에 덧붙여서 다른 사람을 착취하고 이용하고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어서 그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디즘적 경향’은 사회적으로는 더욱 잘 합리적으로 포장되어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한다. ‘마조히즘적 경향’은 자신의 자아를 잊고자 하는 사람이 자신을 비하하고 고통을 당하고 자신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사람은 자신이 어떤 결단을 내리지 않아도 되고, 자신의 운명에 최종적인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며, 생의 의미에 대해 회의(懷疑) 하지 않아도 된다. 이처럼 ‘마조히즘적 경향’도 좋은 도피의 방법이 된다.

그런데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이 둘은 서로 공생적 관계에 있다. 이 둘은 권력관계에서 잘 나타난다. ‘사디즘’ 또는 ‘마조히즘’ 성격의 사람은 권력을 가진 사람이나 제도에 대해 복종적 자세를 나타내며 복종에 대해 사랑과 존경과 헌신의 자세를 갖지만, 그에 반해 무력한 사람이나 제도에 대해서 경멸하는 태도를 취하면서 공격하고 지배하며 모욕을 주려고 한다. 이러한 점 때문에 프롬은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성적 도착(倒錯)이나 신경증(神經症)에 대한 분석이지만, 정상적인 사람에 대해 적용할 때는 ‘권위주의적 성격’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현상은 심리학적으로 설명하면, 진정한 힘을 결여하였기 때문에 이차적인 힘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 곧 위약성(危弱性) 또는 무력성에 근거한 것이다. 이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개인적 자아의 무능력을 말해주는 것이며, 또한 자신의 독자적 존립이 가능하지 못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권위주의적 성격’은 종교와 철학에서도 나타난다. 그것은 자연법, 신의 의지, 인간의 의무로 합리화되고, 이런 것에 복종한다는 것이다. 또 권위주의적 성격은 과거를 숭배하고 기독교의 원죄(原罪) 의식에 종속된다. 이처럼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 주장을 하지만, 그러면서도 프롬은 기독교의 원래 내용은 그렇지 않다는 해석을 하기도 한다.

2) 파괴성의 메커니즘

프롬은 이 지구에서 인간만이 유일하게 생물학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볼 때 합당하다고 할 수 있는 이득도 없이, 같은 인간을 살해하고 고문하며 파괴하는 동물이라고 주장하면서 이와 같은 파괴성이 어디에서 유래하는지 살펴보고 있다.

인간은 생리적으로는 동물의 영역에 머물러 있지만, 동시에 인간적 자아를 의식하는 유일한 동물이기도 하다. 이처럼 인간적 자아를 의식하기에 이 우주 속에서 자신의 고독과 무력감을 실감한다. 이러한 고독과 무력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인간적인 힘이 발전되도록 해서 개인적 통일성을 발견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도피적인 수단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그 도피적인 수단 가운데 가장 효과적인 것이 공격적 파괴성이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은 자신의 고독과 무력감의 공포를 벗어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어떤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데, 이때 대부분의 인간이 선택하는 것은 창조적인 활동보다는 파괴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파괴성의 메커니즘’은 삶을 제대로 실현하려는 노력이 좌절되었을 때 작동한다. 삶을 억압하는 개인적 · 사회적 조건이 파괴하려는 충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프롬은 이러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삶을 구하는 충동이 방해받을 때 파괴를 추구하는 충동은 강해지고, 삶이 실현될수록 파괴적 충동은 약해진다. 파괴성은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삶의 폭발이다. 삶을 억압하는 이 개인적 · 사회적 조건은 파괴에 대한 격정을 낳게 되며, 이 격정은 저수지와도 같은 것을 이루어 특수한 적대적 성향―타인에 대해서건 자기 자신에 대해서건―을 조장한다.

그러고 프롬에 따르면, 이러한 ‘파괴성의 메커니즘’은 개신교의 사상에도 포함되어 있다. 개신교의 도덕적 금욕이 삶을 즐기는 사람에 대한 강력한 질투가 반영된 것이고, 칼뱅이 아무 죄 없는 사람에게 영원한 벌을 선고한 것에서도 나타난다고 한다.

3) 자동인형적(自動人形的) 동조

자동인형적 동조(자동 순응성)는 앞에서 서술한 ‘권위주의 메커니즘’ ‘파괴성의 메커니즘’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고립, 무력감, 무의미성을 의식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렇지만 감정을 극복하는 점에서는 앞의 두 가지 메커니즘과 차이가 있다. ‘권위주의 메커니즘’은 개인이 자신의 완전성을 포기하고 더 큰 힘에 귀속하려는 것이고, ‘파괴성의 메커니즘’은 그 대상을 파괴해서 외부세계가 더는 자신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에 비해, ‘자동인형적 동조’는 개인이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문화적 양식이 제공하는 성격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다른 모든 사람과 전적으로 동일한 인물이 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이 기대하는 인간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와 외부세계의 갈등은 사라지고 고독과 무력함을 두려워하는 의식도 사라진다. 이처럼 인간은 개인적인 자아를 버리고 자동인형이 되어 주위 수백만의 다른 자동인형과 동일해진다. 그 결과 고독이나 불안감을 느낄 필요가 없게 된다. 그렇지만 그 대신 자아 상실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이와 같은 ‘자동인형적 동조 현상’은 인간의 사회화과정을 통해서 더욱 강화되고 있다. 인간은 유년기와 소년기에 이미 외부에서 주어진 사고(思考), 감정, 원망(願望)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훈련되고 또 교육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자발성과 개성을 억압하고 인간의 진정성을 빼앗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창조적 사고, 진실된 감정, 순수한 원망보다도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곧 외부에서 주어진 것을 자신의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현대사회의 관료제의 구조 가운데에서 더욱 심화되고 있다. 오늘날의 인간은 사회에서 조작하는 신념체계에 의해서 조종을 당하면서도 자기 자신은 스스로 자유로운 인간이라는 환상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래서 자신이 신념체계에 무조건 동조하는 자동인형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에 대해 강한 저항을 하는 경향이 있다.

4) 현대사회의 소외현상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3가지 ‘도피의 메커니즘’을 설명하고 뒤의 저서 《건전한 사회》에서는 ‘도피의 메커니즘’을 일부분 계승하고(권위주의 메커니즘, 자동인형적 동조), 거기에다 더 많은 내용을 추가해서 소외이론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는 3가지 ‘도피의 메커니즘’의 맥락에서 《건전한 사회》에서 말하는 소외이론을 검토하고, 《건전한 사회》에서 더 추가된 내용은 추후에 다른 글에서 따로 분석하고자 한다.

우선, 프롬은 《건전한 사회》에서 소외는 스스로를 따돌림을 당한 사람이라고 느끼게 되는 경험 양식이라고 말한다. 그러고 나서 다음과 같이 조금 더 부연 설명한다.

인간은 스스로를 자기 세계의 중심체나 자기 행위의 창조자로 느끼지 못하고 자신의 행위와 그 행위의 결과가 주인공이 되어 복종과 심지어 숭배까지 강요하게 된다. 소외된 인간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있듯이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떨어져 있다.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지각과 양식을 갖고 사물이 경험되는 바로 그대로 경험하지만, 자기 자신과 외부세계를 생산적으로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프롬은 현대사회의 소외현상은 거의 전면적인 것이라고 한다. 현대사회는 여러 가지 창조물을 만들어내었지만, 도리어 이러한 창조물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고 한다. 이 내용에 관한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보는 소외는 거의 전면적인 것이다. 현대의 소외는 사람의 일, 소비하는 물건, 국가, 동료,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까지 파고들고 있다. 인간은 그 이전에는 절대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를 스스로 창조했다. 인간은 그 자신이 만든 전문적인 기구를 이끌어갈 복잡한 사회기구를 구축했다. 그러나 이 모든 창조물은 이제 인간 위에 서 있다. 인간은 스스로를 창조자와 중심체로서가 아니라 자기 손으로 만든 골렘(Golem)의 심부름꾼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자기에게서 놓여난 그 힘이 강력해지고 거대해질수록 인간으로서 자신은 더욱더 무력해짐을 느낀다. 인간은 자기가 창조함으로써 구체화되었으면서도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자신의 힘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창조물 소유가 되어 자기 자신의 소유권마저 잃어버렸다.

그리고 프롬은 《건전한 사회》에서도 ‘권위주의 메커니즘’으로 소외를 설명한다. 일신교의 전통도 ‘권위주의 메커니즘’의 하나라는 취지로 말하고 있다.

일신교 자체도 크게 보면 우상숭배로 귀착된다. 인간은 사랑과 이성의 힘을 신에게 투사한다. 인간은 그 힘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느끼지 않고 자기가 신에게 투사한 것의 일부를 되돌려줄 것을 신에게 바란다. 일신교와 칼뱅주의의 초기에 요구되던 종교적 태도란, 인간은 먼저 자기 자신이 무의미하고 황폐해진 존재임을 인식하고 신의 은총을 믿고 자기가 신에게 넘겨준 자기 자신의 속성 일부를 신이 되돌려주리라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프롬은 《건전한 사회》에서 앞에서 거론한 ‘자동인형적 동조’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프롬은 20세기 중반에 들어서서 권위는 성격을 바꾸었다고 한다. 권위는 공공연한 권위가 아니라 ‘익명의 권위’이다.

이어서 프롬은 ‘익명의 권위’는 ‘동조’를 통해서 작용한다고 한다. 다른 사람이 하는 대로 따라 하고 순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내용에 관한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익명의 권위는 동조의 장치를 통해 작용한다. 나는 모든 사람이 하는 대로 따라야 하고, 어디가 다르거나 유별나서는 안 된다. 나는 일반적인 양식의 변화에 즐겨 따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내가 옳으냐 그르냐를 따져서는 안 되고 내가 적응을 했느냐 다른 사람과 다르거나 유별나지 않으냐 하는 것이 문제 될 뿐이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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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들을 기반으로 하여
1) 현대 사회의 인간 소외 현상을 정의하고 예시를 통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진단해 보자.(800자)
2) 1)의 인간 소외 현상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해 보자. (400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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